2004년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가 체세포 복제를 통해 줄기세포를 만들어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만 해도 당장 몇 년 뒤 치매 환자가 정신을 차리고, 관절염 환자가 무리 없이 걷고, 동물에서 만든 신체를 사람에게 이식하는, 그런 세상이 올 줄 알았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2014년의 현실은 그다지 밝지 않다. 황우석 전 교수의 논문은 조작으로 밝혀졌고 이후로도 각종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최근 일본 이화학연구소 소속 연구원들이 네이처에 발표한 자극촉발만능(STAP)줄기세포 역시 일부 조작으로 밝혀지며 전 세계적으로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줄기세포를 둘러싼 잡음으로 시끄러운 것은 그만큼 학계에서 뜨거운 이슈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줄기세포가 꿈의 치료법이 될 것인지 아니면 사기꾼들만 설치는 온상으로 전락할 것인지는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이제 50년밖에 안 된 신생 분야로 줄기세포가 난치병 치료에 단초를 제공해 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전문가들은 연구 성과를 빨리 내려는 데 조급해하지 말고 기초연구 위주로 탄탄히 다져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당장 몇 년 내 큰 성과를 거두기를 기대하지 말고 10년, 20년 뒤를 내다봐야 한다는 조언이다.
국내 연구 어디까지 왔나
기초연구는 ‘꽝’ 상용화는 봐줄 만
“이번에도 줄기세포인가요?”
최근 의학한림원 모임에서 의사들끼리 수군거렸다. 화제는 단연 일본 열도를 뒤흔든 ‘만능세포’ 조작이었다.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는 오보카타 하루코 박사 등 소속 연구원들이 지난 1월 ‘네이처(Nature)’에 발표한 자극촉발만능(STAP)줄기세포 논문을 철회한다며 사죄의 인터뷰를 자청했다. 일본 과학계의 젊은 영웅으로 떠오르며 노벨상 후보까지 거론됐던 오보카타 하루코 박사는 하루아침에 나락의 길로 들어섰다. STAP세포를 성장동력으로 삼겠다며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 일본 정부도 무색하게 됐고 일본 과학계 위상도 땅끝으로 추락했다.
대한민국은 일본이 겪은 ‘패닉’을 일찌감치 경험했다. 2005년 줄기세포의 선도자로 칭송받던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의 논문이 조작으로 밝혀지며 국내 연구는 침체의 길을 걷게 됐다. 줄기세포 치료제 기업 알앤엘바이오를 둘러싼 잡음도 꽤 시끄러웠다. 라정찬 전 회장(현 케이스템셀 기술원장)은 무허가 줄기세포 치료제를 제조·판매한 혐의를 받는다. 2012년 10월부터 4개월간 481명의 자가줄기세포를 자사 연구소에서 분리·배양한 뒤 이들에게 제공해 중국 상하이에 위치한 협력병원에서 투여받도록 한 혐의다. 임상시험을 거쳐 품목허가를 받지 않은 줄기세포 치료제는 안전성과 유효성이 입증되지 않아 해외 병원에서 투여하더라도 불법 제조·유통에 해당한다. 게다가 라 전 회장은 지난해 6월 주가 조작과 회사자금 횡령 혐의까지 받았다.
줄기세포를 두고 잇단 논문 조작, 관련 기업의 주가 조작 등 잡음이 자꾸 나는 것에 대해 관계자들은 치열한 연구 경쟁에 따른 심리적 압박감과 세계 최초 타이틀에 대한 집착, 빨리 시장을 선점하려는 기업의 무리한 영업 등을 이유로 꼽는다.
현재 의학계에서 모든 세포로 분화가 가능한 줄기세포만큼 뜨거운 연구 분야도 없다. 고령화 사회에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는 알츠하이머, 파킨슨병 등 퇴행성 뇌질환은 현재 치료법이 없지만 줄기세포를 활용한 치료가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감에서다.
생명공학정책연구센터에 따르면 1990년대 초반부터 최근까지 세계 각국의 줄기세포 논문은 연평균 12.2%씩, 특허는 23%씩 늘었다. 국제적인 연구 경쟁이 가장 치열한 분야 중 하나라는 방증으로 워낙 경쟁이 심해 다른 연구자에게 추월당할까 봐 초조해하는 연구자들이 적지 않다는 후문이다.
이런 ‘조급한’ 분위기는 논문 조작 스캔들에 휩싸인 일본도 마찬가지다. 이화학연구소는 2012년 유도만능줄기세포(iPS)로 노벨상을 받은 교토대 야마나카 신야 교수팀과 치열한 경쟁을 해왔다. 연구 성과를 발표할 때도 “(경쟁 상대인 교토대) iPS의 단점을 극복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유독 줄기세포 부문에서 잡음이 많다”는 곱지 않은 시선에 대해 국내 연구자들은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논문 철회나 조작은 종종 발생하는데 유독 줄기세포에 관해서 더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는 것. 줄기세포 연구 학자들은 일부 자동차가 리콜된다고 해당 차종 생산 자체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항변한다.
줄기세포 연구 역시 일부 스캔들로 연구 자체가 위축돼선 안 된다는 기류가 팽배하다. 줄기세포 연구가 성과를 내려면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미래창조과학부가 120개 국가전략기술을 2012년 기준으로 평가한 결과, 바이오 분야는 미국의 77.3% 수준으로 5년 격차가 난다. 12개 바이오 세부 분야 가운데 줄기세포와 관련된 분화·배양기술은 미국의 85.8%(2.8년)로 평가됐다. 우리나라가 가장 앞선 IT 분야가 미국과 2.9년 격차가 나는 점을 감안하면 줄기세포 분야는 상당히 진전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국내 줄기세포 연구 실력은 탁월하지 않다는 게 과학계의 냉정한 판단이다. 지난 2004년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가 인간 배아줄기세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은 국민들이 한국이 세계 줄기세포 연구를 선도하는 것으로 믿게 만들었다. 결국 조작으로 판명 났지만 아직도 우리나라가 줄기세포 강국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국내 연구가 실용화(분화·배양기술) 기술에 몰려 기초기술은 취약한 점을 감안하면 전체 줄기세포 기술은 상당히 떨어진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줄기세포 연구가 이제 불과 50년 된 신생 분야라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성과 이어져도 상용화 속도 안 빨라
국내 연구의 품질·영향력 낮은 수준
지난 1961년 캐나다 과학자 어니스트 맥컬럭과 제임스 틸이 피를 만드는 일종의 성체줄기세포(제대혈·지방 등에서 뽑은 줄기세포)인 조혈모세포를 발견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톰슨 박사팀에 의해 수정란에서 유래한 인간배아줄기세포를 처음으로 확립한 1998년은 줄기세포 연구의 기념비적인 해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줄기세포 시대가 개막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2002년 성체줄기세포가 특정 환경에서 신경·혈액세포 등 다양한 세포로 분화되는 것을 증명했다. 2006년에는 일본의 야마나카 신야 박사가 역분화 유전자를 쥐의 체세포에 주입해 윤리 문제를 없앤 유도만능줄기세포(iPS)를 만들었다.
지난해에도 줄기세포 연구 성과는 쏟아졌다. 미국 오리건 보건과학대의 슈크라트 미탈리포프 교수팀은 체세포 복제기술을 사용한 배아줄기세포 복제에 최초로 성공했다. 일본 요코하마시립대 연구팀은 피부세포로 만든 줄기세포를 이용해 사람의 간 씨앗을 만들었다. 심지어 중국 베이징대 연구진은 유전자를 사용하지 않고 화학적 방법만 활용해, 암세포로 진행될 위험을 대폭 줄인 iPS세포 제작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국내 연구진도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건국대 의학전문대학원의 한동욱 교수는 세계 최초로 체세포를 원시 줄기세포 단계(iPS세포)로 되돌리지 않고 바로 신경줄기세포로 역분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성과는 ‘미국 뉴욕 줄기세포재단’이 선정한 2011~2012년 10대 줄기세포 연구에 선정됐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조이숙 박사팀은 지난해 저분자 화합물을 이용해 iPS세포의 역분화 효율을 높이는 기술을 개발했다. iPS세포의 문제점인 암 발생 가능성을 줄인 것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논문의 질이나 영향력은 떨어진다. 미래창조과학부에 따르면 지난 2012년 줄기세포 한국 논문 562건 가운데 네이처·셀 등 영향력지수(IF) 20 이상인 학술지에 게재된 것은 단 1건에 불과했다.
기간을 최근 10년으로 늘려 보면, 한국 논문의 피인용 횟수는 4점대로 세계 평균(6점)에 미치지 못한다. 피인용 횟수가 가장 높은 논문 상위 20개 중에도 국내 연구진 논문은 한 건도 포함되지 못했다. 이 기간 동안 상위 500개 줄기세포 특허에서 한국은 1개만(점유율 0.2%) 뽑혀 미국 405개(81%), 일본 33개(6.6%)와는 격차가 컸다. 심지어 중국 2개(0.4%)에도 못 미쳤다. 한마디로 실망스러운 숫자다.
줄기세포 연구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너무 많이 남았다는 점 때문에 낙관과 비관이 섞여 있다. 현재까지도 줄기세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치료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기본 메커니즘이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신의 경지에 도전하는 인간에 대한 경고인지 몰라도 동물실험에서는 드라마틱한 효능을 보인 줄기세포 효능이 인간에게는 발현되지 않는 이유도 밝혀지지 않았다. 때문에 가시적인 줄기세포 연구 효능을 기대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한편 연구 초반부인 지금, 우리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세계 줄기세포 연구를 주도하느냐 아니면 연구 경쟁에서 탈락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미국과의 2.8년이라는 기술 격차는 언제라도 뒤집을 수 있다는 의미다.
이를 위해 정부가 풀어줘야 할 규제가 적지 않다. 연구진과 기업들은 임상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지적한다.
치매 연구 분야의 국내 일인자로 꼽히는 나덕렬 삼성서울병원 교수는 “치매와 같이 딱히 치료방법이 마땅치 않은 경우 안전성만 확보되면 환자를 대상으로 처방을 하도록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 업계 관계자는 “줄기세포를 활용한 치료는 약도 시술도 아닌 새로운 영역인데 이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없다”며 “현실을 감안한 규제안이 나와야 줄기세포 연구가 더 발전할 수 있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특별취재팀 : 명순영(팀장)·김헌주·노승욱 기자 / 사진 : 윤관식 기자 / 그래픽 : 송준영]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750호(03.26~04.0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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